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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하다2008/07/02 16:03

사랑 후에 오는 것들

2005년 한일 우호의 해를 기념해 두 나라의 대표적인 작가 공지영과 츠지 히토나리가 각각 여자 주인공 최홍(베니)과 준고(윤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 "먼 하늘 가까운 바다"라는 제목의 한일 공동 소설로 2005년 10월부터 두 달여간 한겨레에 연재 되었다.

연애 소설을 싫어하고 책읽는 속도도 느린 나지만 둘의 재회에서 부터 시작해 그들의 과거의 만남과 추억, 헤어짐과 오해를 풀어가면서 결말로 다가가는 구조에 빠져서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츠지 히토나리 편이 좀 더 자세하게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고 공지영은 최홍의 감정에 대해 많이 담고 있어서 공지영 편을 먼저 읽고 좀 더 궁금증과 설렘을 안은 채 츠지히토나리 편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드는 구절을 적어 둔 것도 공지영 편이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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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움직인 구절
; 공지영, 최홍, 베니

누가 무어라 하든 말든 나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기적도 있고, 우연을 가장한 필연은 정말 있으며, 진심으로 간절히 원하면 풍요로운 우주의 선이 나를 도와줄 거라는 열렬하고 턱없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그가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벚꽃이 날리던 그 봄날에 성큼성큼 걸어와 떨어진 소년 인형을 주워 주던 그 모습 그대로. 아니, 그 모습 그대로라는 말이 과연 합당할까. 형편없이 말랐던 그때보다 살이 조금 올라 있었고 얼굴은 조금 까칠해져 있었다.

그 옛날 내게 했듯이 가끔 멈추어 서서 부드러운 눈길로 얼굴을 바라보며, 네 빛나는 눈이 참 예뻐, 하고 말하겠지. 어처구니없게도 그때처럼 가슴이 아파 왔다. 그때 나는 그의 곁에 있는 모든 여자를 질투했었다. 칸나라는 여자는 물론이고, 그가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 있던 뚱뚱한 아주머니까지. 공원을 걷다가 그가 일으켜 세워주었던, 넘어진 열 살짜리 꼬마 아이까지. 그게 누구든 그가 나 이외의 모든 여자에게는 찡그린 표정만 보여주었으면 했던 것이다. 그게 터무니 있든 없든 그랬다. 나는 그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살고 싶었다. 그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고 싶었다. 가끔 그의 손이 내가 살고 잇는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오면 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잠들고 싶었다.

‘말이야. 두꺼비집이 닫히는 것처럼. 물기 묻은 전원에 스위치가 자동으로 차단되는 것처럼. 사랑 같은 거. 호감 같은 거. 느끼려는 순간 철컥 하고 스위치가 내려져.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야. 그런데 그 이후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어.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아. 감정이 암전된 것만 같아.’

담담하고 당당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나는 더 이상 입을 열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지난 칠 년을,.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내려앉았던 빨간 심장을 다 토해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하느님은 내게 그런 우연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꽃이 다 지도록 나는 그를 만나지 못하고 호숫가 벤치에 앉아 혼자서 그것을 다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멀리서 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가방에 있던 인형을 꺼내 주었던 것은, 내 손에 더 이상 따뜻한 크로켓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연습해 두었던 말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는 그 인형을 받아 들고 나를 향해 웃었다. 나도 웃었다. 말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베니, 네 얼굴은 늘 이상한 생기로 가득 차 있어. 일이 힘들어지면 나는 늘 네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빛을 기억해.”
그건 준고가 한 말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나이가 든 필자 선생님이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었다.
“최홍 씨는 가끔 참 어두워, 세상을 다 살아 버린 사람 같아.”
그때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
“선생님에게는 독한 추억이 있나요?”
나는 조금 술에 취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시비 걸듯이 대꾸할 수가 없었을 테니까.
“아무리 몸을 씻어도 아무리 딴 생각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 취기 같은, 그런 독한 기억이 있느냐고요?”

“사람이 사는데, 꼭 나쁘다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더구나 누구를 사랑하는데. 그건 말이야, 그거 과거의 일일 뿐이야. 되돌릴 수도 없는 거. 그냥 오늘을 살고 내일을 바라보고 그러는 게 좋지 않겠니?”

민준이 소주잔을 입에 가져가려다가 가볍게 웃었다.
“내가 언제 못하게 했어, 먹으면서 천천히 하라고 했지. 말할 시간은 많을 거야. 그러다 보면 그 말을 하는 동안, 네가 말하는 그 감정이라는 것도 변해 가. 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잊어버리고, 네가 왜 그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게 되고, 감정은 변하는 거니까. 그건 고마운 거야. 변하니까 우린 사는거야.”

어렸을 때 읽은 동화에 그런 말이 나왔었다. 꿈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마음껏 이 세상을 떠돈다고, 만일 당신이 꿈속에서 누군가와 만났다면 그건 그 사람의 영혼도 밤새 당신을 만난 거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어제 준고의 영혼도 나와 함께 이노카시라 공원 근처에 있었던 것일까.
세상에서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은 흘러간 강물과 지나간 시간과 떠나간 마음이라는데, 밤마다 내 영혼만 호숫가를 서성이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쓰라렸다.

“바보같이 넘어지기나 하고.”
나는 내 자신에게 말했다. 그러자 눈가에서 미지근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얼른 훔쳐냈는데 또 나왔다. 나는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두 팔에 얼굴을 묻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마음씨 좋은 산책객이 내가 넘어지는 꼴을 보았는지 내게 다가와 괜찮으냐고 물었다. 다이조부? 하고 묻던 그의 일본어가 그리로 겹쳐졌다. 넘쳐흐르는 눈물이 내 팔뚝을 금방 적시는 것을 느끼며 내가 대답했다..
“괜찮지 않아요. 아파요…… 많이 아파요.”

“언니 나머지 하나는 내가 말해 줄게. 두려워하지 마. 설사 여기서 다시 영영 이별을 하더라도. 언니가 하고 싶은 말을 해. 언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나 아직 사는 게 뭔지 사랑이 뭔지 잘 모르지만, 해놓고 하는 후회보다 하지 못해서 하는 후회가 더 크대.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마음을 움직인 구절
; 츠지 히토나리, 준고, 윤오


그때를 생각하면 마치 색 바랜 청춘의 낙서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홍이와의 추억은 생생하고 쓰라리며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들 뿐이다. 같은 시간이 거기에도 흘렀으나, 이쪽은 마르지 않는 수맥을 더듬어 가듯 살아 있는 기억들뿐이다. 앨범 속의 오래된 사진이 아닌 지금도 퇴색하지 않고 움직이는 필름과 같은 선명한 영상이다.

"한국은 바로 지척, 바다만 건너면 되는 곳이에요. 마음만 있으면 금방에라도 갈 수 있는 곳이죠. 문제는 준고 씨와 홍이 씨 마음이 솔직하게 만날 수 있는 순간을 찾는 것뿐이죠. 젊은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요. 다시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건 단 하나, 바로 용기에요."
시즈코는 지나간 날들의 빛을 바라보듯,
"내게는 그게 부족했어요. 내게 용기가 있었다면 내 마음을 최한 씨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덧붙였다.

시간이 정지된 우주 공간의 무중력 상태에서 우리 둘은 마주하고 있따. 위도 아래도 빛도 소리도 없으며, 거리도 높이도 없는 시공간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다가오려하는지, 멀어지려 하는지조차 알 수 가 없다.
우리는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별의 파편이다. 원래는 하나였던 별의 파편. 중력에 끌려가며 다음 순간, 빅뱅의 예감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파편. 홍이는 나를, 나는 홍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베니
그가 기억하든 안 하든 그건 상관없었다. 내가 했던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야, 라고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때 오징어볶음으로 젓가락을 뻗던 준고가 멈칫했다. 내 가슴이 그의 손동작에 따라 함께 멈칫했다. 우리의 추억이, 우리가 함께 했던 날들이, 우리의 이 이상한 마주침이 함께 멈칫했다. 어쩌면 그때 자전하던 지구도 멈칫하는 것처럼 현기증이 일었다.
‘끝난 거야. 그건 한때였던 거라고.’
나는 나 자신에게 다짐했다.
“고맙습니다. 실은……. 예전에 정말 좋아했던 한국 여자가 있었어요. 하지만 내가 그녀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지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멈칫한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슬픈 눈빛이었다. 베니, 오해를 풀고 싶다, 라고 말하고 싶은 듯했다.
그의 슬픈 눈빛이 서른 살이 되도록 차가운 북극의 바다를 떠돌다 온 빙하처럼 내게 와서 박혔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 과거형도 함께 그 빙하를 타고 있었다. 좋아했던, 좋아했던, 예전에, 그러니까 청춘의 어느 한때…… 그 예전에 라는 단어가, 이 자리에서 그가 손을 내밀면 그게 북극이든 남극이든 그가 내미는 손을 잡고 어디로든 가고 싶어하는 터무니없는 내 망상을 잠재워 주었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선생님의 사랑이 거짓이었다는 거군요.”
꼭 그렇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 입은 마치 그와 헤어지던 그날처럼 가시 돋친 말들을 내 뱉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듯했다. 그래 본 적은 없지만 누군가의 선한 눈동자에 내가 비수를 꽂는다면 그런 비명이 소리없이 흘러나올 것이라는 것을 나는 순간 느꼈다. 일본 영화에서 보았던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에 비수를 찌르는 사무라이의 심정을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윤오
접시에 담긴 음식을 본 적이 있다. 그건 홍이가 기치조지 내 아파트에서 몇 번이나 만들어 준 적이 있는 오징어볶음이다.
최한이 홍이를 나무랐다. 늦게 온 데다 새삼스럽게 음식을 시키면 어떻게 하냐는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제가 먹겠습니다.”
홍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나를 위해 오징어볶음을 만들었을 때였다. 마음처럼 되지 않았는지 시무룩해 있던 홍이는 언젠가 준고 생일에 정말 맛있는 오징어볶음을 먹게 해줄게, 하고 말했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이 내 서른 번째 생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홍이가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흔들렸다. 음식으로 젓가락을 가져간다. 홍이가 만든 음식을 먹는 것 같아 나도 몰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고마워요.”
복받쳐 오는 기쁨이 눈물이 되어 흐르지 않도록 꾹 참으며 인사를 한다.
“고맙습니다. 실은……. 예전에 정말 좋아했던 한국 여자가 있었어요. 하지만 내가 그녀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지요.”
아버지가 곁에서 홍이의 얼굴을 살폈다. 홍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서로의 눈동자 깊은 곳에 차마 다 숨기지 못하고 쌓아 둔 거짓을 찾아내고 만다.
홍이가 입을 열었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선생님의 사랑이 거짓이었다는 거군요.”
최한이 묵묵히 술잔을 비우더니 헛기침을 한다. 그리고 나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죠. 사사에 선생, 그렇죠? 당신은 분명히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홍이가 시선을 피했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갑자기 홍이가 일어나더니 저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최한이 딸을 바라보며 뭐냐, 아직 십오 분도 채 안 됐잖아, 하고 나무란다.
“전부터 있었던 약속이에요. 사사에 선생님, 먼저 일어나서 죄송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 잘 부탁드려요.”
가위로 가슴 한쪽을 잘라 낸 것 같은 아픔이 남았다. 홍이는 내게 희미하나마 희망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 그 희망이 채 부풀기 전에 다시 떠나려고 한다. 그렇다. 그녀의 약혼자 곁으로. 그의 프로포즈를 받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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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캉짱